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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W뉴스(기독교복지신문)



개혁논단

서재주 교수의 칼빈의 구원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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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RW 뉴스 작성일15-02-0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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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과 구원론
 
1.1. 신학함과 구원

신학이나 역사, 혹은 어떤 종류의 글이든지 그 역사와 글에는 스토리라인이 있고 내용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토리라인이 아니라, 그 내용과 내용이 지시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성경과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라인(storyline)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스토리 라인에 함의되어 있는 내용(contents)과 목표(goal)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인지는 반드시 실천적 체험과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경의 스토리라인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 함의된 신앙의 목표와 내용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또한 실천적 체험과 행위로 나타내지 않고,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면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의 복들(fructus)을 소유하는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보다, 신학서론과 논리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하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의 복들을 우리 것으로 삼기보다, “존재와 사유”의 인식론적 이해를 추구하는 서양사(the Western History)의 영향 속에서 논리적 체계와 개념적 의미추구의 신학으로 변형되었다. 
 
서양 지성사에서 신앙은 때론 이성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때론 이성이 신앙보다 우위를 점하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신앙우위 속에서 이성의 사용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신앙이 이성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오직 신앙”을 신학의 제일원리로 주장하고 나왔다. 
 
한 마디로, 정통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들”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린 신앙의 역사이다. 신앙은 결코 스토리라인에 대한 지성적 이해가 아니다. 성경의 스토리는 우리보다 마귀가 훨씬 더 잘 안다.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안다. 그래서 신앙은 스토리라인을 추구하는 성경에 대한 인식론적 추구가 아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복들(fructus)을 소유하고, “그 복들”을 누리며, 영생을 알고, 그 영생을 소유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을 소유하는 방법, 맛보는 방법, 그리고 영생을 취하는 실천적인 체험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보면 이 복을 소유하고 맛보고, 즐기려는 노력보다,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려는 일에 집중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폭력과 스콜라 신학 속에서 질식할 듯이 짓이겨진 신앙과 은혜의 역사가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혁자들의 신앙 양심을 통하여 잊어 버렸던 신앙과 복음을 여명의 깃발처럼 휘날리게 했다. 그러나 이후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에 이르는 “이성의 역사”로 명명되는 이성적 사유는 루터와 칼빈이란 두 개혁자의 손에 들려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져오신 은혜의 복들(fructus)을 소유하기 위한 기독교를 무력화 시키고 말았다. 
 
다시 말해, 18세기 사유(이성)가 지배하는 합리적인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앙의 실재들과 신앙의 유익을 추구하는 신학이 머리털이 잘려 “블레셋 방백의 노리개”가 되어 버린 무력한 삼손처럼,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지 못하는 무력한 신학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신앙의 능력은 상실하고, 성경의 모든 실재성은 이성이라는 이름하에 언어게임의 논리 규칙으로 바뀌고, 은혜의 복들은 인식론적인 개념적인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학의 역사는 더 이상 신비한 영적인 실재를 포함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경건한 연구의 장이 아니라, 불경스러운 인간의 지성적인 욕구 앞에 마음대로 파헤쳐지고, 갈기갈기 찢기고, 퍼즐놀이 하는 철없는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이상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할 수 없는 세대가 되어 버렸고, 도리어 ‘구원이 뭐!’라고 항변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무지한 이성의 교사들은 신앙의 선진들이 지켜 온 신앙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들과 그 능력을 짓이겨 버리고, 오만한 인문주의 신학자들은 루터(M. Luther)가 마귀의 이론이라고 지칭했던 철학적 인식론으로 생명의 복음을 난도질 하고, 무익한 삯군 목자들은 영원한 하늘의 은혜와 복들을 썩어질 세상의 것들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자랑한다. 
 
“이성”이라는 괴물은 성경의 모든 실재의 사실들(the facts of realities)을 인식론적 허구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이성주의자들은 더 이상 성경의 사건을 실재의 사실로 믿지 않는다. 도리어 허블 망원경이 수천광년 떨어진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 이 시대에, 이름 없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예배당의 문턱만 넘나들며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진화론을 믿는 친구를 둔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과학을 더 신뢰한다. 결코 경건한 신자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에 관하여(about),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about) 아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16새기 위대한 개혁자 루터(M. Luther)도 하나님에 관해서(about God),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 내용이 참이라고 믿는 지식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과, 하나님(God)을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누리며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에 관해서 말한 모든 내용들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accomplish),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베임을 당한 나무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신학과 신앙도 갈기갈기 찢긴 고난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이어왔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J. Calvin)을 통하여, 교회의 순수성에 목숨을 건 청교도인들(puritan)을 통하여, 세속화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리(J. Wesley)를 통하여, 미국 신학이 좌경화 되었을 때,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통하여, 일제의 압제의 암운이 드리운 한국 땅에서 평양 대부흥의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앙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구원의 실재성은 인식론적 신학 앞에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보의 전진도 없이, 오히려 더욱 더 심각한 모습으로 심화되고 있을 뿐이다. 경건한 의인들은 이러한 위협 앞에 허둥대며, 가슴을 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어느 때까지리이까”(합 1:2)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역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가 숨겨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질곡 속에 의로움과 구원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자리에로, 고난의 역사에로 부름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그리고 인내하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와 구원의 나팔을 고대한다.
 
성경은 죄와 천국을 의미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소유할 실재(reality)라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그것을 믿는 것은 의미의 진술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재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st autem fides sperando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parentum)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열매들은 인식과 앎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살아 역사하며 우리 속에서 확증될 때, 실재가 된다. 바른 신앙은 그리스도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며 참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영혼을 살리셨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서양의 지성사는 성경의 실재(substantia)들을 “의미 있음”으로 만들어 왔다. 하기야 오늘날은 이러한 의미추구조차도 거추장스러운 듯 영적 실재를 썩어질 물질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인식론적 “의미 추구”와 “물질 만능”라는 두 적과 맞서야 하는 곤경에 처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적 지성(intelligence)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오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딱딱한 논리적 지성(hard logical intelligence)의 포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이성은 오만하게도 초자연적 실재를 지식의 대상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계몽주의 이성의 자녀들인 “합리적 세계관”과 “무적의 인식론적 사고”로 무장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를 한갓 공허한 메아리로 취급할 뿐이다. 
 
성경이 부패한 이성에게 아무리 영생과 하늘의 영원한 복을 가르쳐도 그것을 공허한 메아리로 생각하고 썩어질 땅의 것으로 바꾸고 만다. 이성의 빛에 눈이 멀어버린 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보다, 이성의 빛에 투영된 십자가의 허상만을 볼 뿐이다. 그들은 십자가 속에 숨겨진 영적인 하늘의 복을 누리는 즐거움보다, 세상이 주는 감각적인 쾌락이란 독주를 마시고 취해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가져 오신 은혜와 복들을 위하여 결코 “결의하고, 포착하고, 맛보는(to taste)” 신앙을 갖지 못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물론 기독교는 이성적인 인식 논리로 볼 때 불합리 것이 많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는 불합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성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그것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신앙은 이 모순과 역설이 자리하는 곳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원한 하늘의 복을 본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이란 경험적인 실재성과의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그것에 숨겨져 있는 실재성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이요, 이성과 체험의 모순을 감내하는 것이며, 약속의 말씀에 비추어서 그 세상적인 실재성을 돌파해 나가는 능력“이라고 했다.
 
 신앙은 현대 정신에 의해 암울하게 짓밟혀 버린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의 실재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지 모순되는 이 세상적인 실재성을 돌파해 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내어야 하며, 여기서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율법의 말씀을, 율법에 나타난 그의 진노를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WA 19,224, 21.). 그래서 루터는 “경건한 신자는 불가능한 사실들과 관계하는 한 영웅이다”(WA 27,276,8,31.)라고 선언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진보를 이루고 과학적인 인식원리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생명공학은 영장류의 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첨단 정보 통신과 과학 문명은 이전의 고귀한 가치들을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첨단 과학문명은 우리 모두의 시선을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에 붙들어 매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영적이고(spiritual)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을 꿈꾸지 못하는 꿈이 없는 백성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남다르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신앙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돌파해 나가는 능력이다. 신앙은 부패할 경험적인 지식과 투쟁하는 능력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나의 것으로 삼아 그 은혜의 유익을 나의 유익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자는 보이는 세상과 경험된 지식으로부터 생각과 눈을 돌려 믿음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 오신 큰 구원은 봄(to see)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들음(to hear)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결국 신학함은 신앙의 눈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divinae benevolentiae erga nos)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는 일이다. 이일은 위해 말씀을 올바른 질서와 순서에 따라서 신앙의 목표에 연결시키고, 그것의 실재를 확증하도록 돕는 일이 되어야 한다.
 
                    다음호 계속....... (저자의 각주는 책에서, 책 구입은 본사로 문의) 

편집/곽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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