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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W뉴스(기독교복지신문)



개혁논단

서재주 교수의 칼빈의 구원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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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RW 뉴스 작성일15-03-3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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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와 칼빈주의

구원의 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서술한 용어이다” 구원의 순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고, 무엇을 목표로 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칼빈주의 신학은 구원의 순서를 종교개혁의 산물로 이해하며 구원 순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구원의 순서와 배열이 갖는 의미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하늘의 복과 영생에 대한 신앙적 열매를 다루는 일, 신앙으로 그것을 실제적으로 소유하는 일에 보다 큰 신학적 관심을 두었다.


구원의 순서는 성령의 활동을 논리적인 순서로 상호 연관 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의 복들(benefits)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구원론을 다루는데 있어서 구원의 순서는 많은 신학자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구원의 순서에 관한 논의는 성경 어디에도 정확한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서 8장 29-30절에 근거하여 구원의 순서를 다룬다. 따라서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머레이는 그의 책(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구원의 다양한 과정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로마서 8장에 근거하여 부르심(Calling), 믿음(faith), 회개(repentance), 중생(regeneration),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견인(perseverance), 영화(Glorification)의 순서를 제시한다. 그리고 구원의 순서에 관련하여 다소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벌코프는 구원의 순서를 부르심,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성화의 순서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순서를 거부하는 벌카워(G. C. Berkouwer)는 구원의 자체가 갖는 풍성함에 이르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순서를 거부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퍼져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순서”라는 말이 구원론에 있어서 유효한 표현인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 대답은 정확히 Yes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의 순서는 논리적 의미에서 혹은 원인적 의미에서 어떤 순서를 가진다 할지라도, 시간적이고 통시적 측면에서 구원은 동시적 사건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건은 계속적으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 순서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이해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이는 우리의 구원의 복이 하나님의 단일한 사역으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후크마는 구원의 과정을 “동시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여기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의 순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 경도되어 버린 인식론적인 구원론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칼빈주의가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헤르만 바빙크(H. Bavinck), 워필드(B. B. Warfield), 보스(G. Vos),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혹은 박형룡 같은 화란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자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칼빈주의에 대한 이들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잘 아는 바처럼, 한국적 칼빈주의 신학은 구원론적 관점에서 구원의 논리적 순서에 집착하는 신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최초로 그 자리를 마련한 칼빈은 그의『기독교강요』를 통해 신앙, 중생과 회심, 칭의, 성화, 예정, 부활이라는 순서를 정하였다. 그러나 현대 신칼빈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칼빈의 의도와는 달리 논리적 순서에 치중하여 중생 앞에 칭의(영원 칭의)를 말하고, 신자의 자녀인 경우 유아세례 이전에 세 생명의 씨가 마음속에 심어지는 중생을 주장한다. 카이퍼는 중생을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이며 구원 적용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중생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자기 백성을 아셨고 이들을 택하사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 전에 의롭다 함을 입게 하시는 영원 칭의를 주장한다.


또한 칼빈주의 신학자 바빙크(Bavinck) 역시, 구원의 순서를 강조하는 구원론을 전개한다. 바빙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으로 말미암아 자연과 양심 속에서 오는 일반소명과 기독교 아래 삶을 사는 모든 자들에게 미치는 특별소명을 구분한다. 그리고 소명이 사람에게 임하는 방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외적소명과 내적소명으로 구분하고, 외적소명은 하나님의 손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사역을 준비하는 수단이며 내적소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적인 친분을 다시 갖도록 하는 소명이다.


또한 중생은 사람의 힘이거나 길고 점진적인 자연 상태의 발전적 소산이 아니라, 옛 존재를 버리고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탄생하는 창조적인 시작으로 본다. 이 변화는 영적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신비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인간의 인격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능력들, 곧 그의 이상과 마음의 의지, 감정, 그의 영과 몸에 퍼진다. 이처럼 모든 구원의 각각의 국면이 하나님의 사역이요 의와 은혜의 사역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빙크는 그의 신학의 출발점을 일반종교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나마 개혁주의적 방법론을 벗어나 있다.


또한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구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은혜의 동시성과 상호성을 통하여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는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후크마 역시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신학이해를 따르고 있다. 후크마는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구원의 순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복음의 초청-효과 있는 부르심-중생-돌이킴-회개-믿음-칭의, 양자됨-성화-견인의 순서를 따른다.


그러나 후크마는 앞서 말았듯이, 이 모든 사건들을 순차적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며 상호적인 사건들로 이해한다. 또한 후크마는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데 있어서 다른 여타의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동일하게 중생을 믿음 앞에 둔다. 그리고 중생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것과도 관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돌이킴은 중생의 외형적 사건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인간의 일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벌코프((L. Berkhof)도 마찬가지로 칼빈의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칼빈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신비적 연합의 본질을 네 가지로 강조하여 설명한다. 첫째, 구속의 경륜에서 그리스도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과의 언약적인 연합, 둘째, 구속의 경륜에서 관념적으로 확립된 생명의 연합,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 넷째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을 말한다.


그리고 내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중생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중생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중생은 인간 본성의 실체적 변화가 아니며, 본성 전체나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도 아니다. 회심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회개와 죄인의 의식 영역에서 야기되는 변화인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구원의 순서들은 다른 칼빈주의자들과 거의 동일한 순서를 취한다. 특별히 벌코프는 예정론에 근거하여 견인의 교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주관적 적용이라는 논리적 순서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가 신자에게 어떤 유익을 제공하고, 신자가 누리는 유익이 무엇이며, 그 유익의 기쁨과 누려짐이 어떤 것인가를 진술하는 중요하다. 그래서 최근 일부 칼빈주의 학자들은 구원의 순서가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느냐 하는 의구심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칼빈도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체계적 진술의 목적으로 일련의 순서를 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구원의 논리적 순서보다 실제적으로 은혜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은혜를 통하여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논리적 의미로써 중생을 믿음 앞에 두지 않는다. 칼빈은 오히려 믿음 이후에 회개를 다루고 회개를 중생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칼빈 구원론이 구원 순서의 논리적 전개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그의 전 신학에서 중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는 은혜의 복들을 우선적인 ‘신학함’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구원의 순서는 17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변증을 위한 목적으로 조직화, 체계화 되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칼빈이 의도하는 ‘신학함’의 목적과는 다소 다르게 은혜가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논리적 순서와 체계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순서와 체계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고 소유하는 은혜의 복들을 추구하기보다, 논리적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둔다. 따라서 구원론을 다룰 때, 구원의 논리적 순서 이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순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져오신 은혜의 열매들과 복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II 칼빈의 구원론과 신학원리

1. 칼빈 구원론에 대한 서론적 이해

일반적으로 칼빈신학(Calvin's Theology)이라면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만들어진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나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카이퍼(A. Kuyper, 1837-1920), 바빙크(H. Bavinck, 1854-1921)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개념화된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생각한다. 그러나 16세기 칼빈은 칼빈신학에 논리적 귀결을 덧붙여 개념화 된 신학적 체계보다, 성경의 초자연적 은혜의 실재성과 풍부한 영적 은혜의 “복들(유익)”(fructus)을 실제적으로 소유하고 누리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칼빈은 조직화 된 체계를 강조하는 인식원리보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들”, 그리고 영적 실재들(realities)이 무엇이며, 그것을 “신앙의 목표”와 어떻게 연결하고 맛보고, 경험할 것인가에 주목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17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함께 발전한 칼빈주의(Calvinism)가 16세기 칼빈신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의 실재성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져오신 풍성한 영적 은혜에 집중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즉, 칼빈주의 신학이 인식론적인 이해에 치중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목표”(scopus fidei)와 “신학함”의 목적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많은 논쟁을 야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6세기 칼빈신학과 17세기 이후 발전한 칼빈주의와의 신학적 연속성은 무엇인가? 또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칼빈신학에서 칼빈주의로의 발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 많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칼빈주의자들은 16세기 칼빈신학과 17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더불어 발전한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에로의 이행의 문제, 또한 칼빈신학과 개신교 정통주의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16세기 칼빈신학과 칼빈주의 혹은 정통주의와의 미묘한 신학적 혹은 방법론적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책은 칼빈신학과 정통주의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보다, 멀러(Richard A. Muller)의 주장처럼, 칼빈신학과 정통주의와의 내용적 연속성과 방법론적 불연속성의 관점에서 칼빈의 구원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칼빈신학은 구원론적 체계를 가진 신학이다. 그리고 구원론적 체계 속에서 구원론의 중심 주제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복들)”을 그의 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17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이성의 세기(the age of reason)를 거치면서 칼빈신학의 중심적인 주제인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이 약화되거나 그 중요성이 간과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칼빈신학에서 칼빈주의로의 이행에서 찾을 수 있다. 즉, 16세기 이후 칼빈의 계승자들은 가톨릭의 공격으로부터 개혁신학을 변증하기 위하여 칼빈신학에 신학 서론과 연역적 추론을 더함으로써 합리적인 신학체계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증적인 노력은 칼빈신학(Calvin‘s Theology)의 표지로서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 예정론, 절대주권과 같은 개념화된 교리로 나타났고, 결국 변증을 위한 신학서론과 연역적 추론에 의한 개신교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의 발전은 칼빈신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구원론적 토대와 본질, 은혜의 실재성과 역동성을 놓치는 결과를 야기했다. 둘째, 18세기 이성의 세기를 거치면서 철학적 방법론에 근거를 둔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은 칼빈의 강조하는 은혜의 복들과 영적 실재를 단지 “의미”(meaning)와 “인식”(cognition)의 문제로 변질시켜 버렸다.


칼빈은 성경 주석에 근거하여 다른 어떤 사람보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를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고도의 논리적 체계를 세우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은 복음이 갖는 영적 유익과 풍성함을 드러내고, 성경이 목표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칼빈은 결코 신학과 신앙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신학은 생명을 살리고 영생을 소유하도록 신앙을 일으키도록 돕는(serving) 학문이다.


신학은 성경에 대한 인식활동이 아니다. 신학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들을 소유하고, 그 복들을 누리며, 신앙의 목표를 알고, 영생을 취하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신학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져오신 유익을 소유하고, 맛보고, 경험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의미와 실재, “복음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의 괴리를 극복해야 한다.


칼빈 구원론인『기독교강요』3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가져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열매들(fructus)을 우리가 어떻게 받고 누릴 수 있는가를 말함으로써 구원론을 시작하고 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소유하는 영적 실재(reality)이며, 맛보는 은혜의 풍성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이해나 주장이 아니라, 구원의 실재를 확신하고, 경험하고, 소유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과 대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우리는 이 구원의 유익을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의 심령과 삶이 부유해지지 않는 것인가? 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하늘의 삶에 전부를 걸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들을 소유하는 방법(Method)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참으로 은혜의 열매들을 소유하고 누리지 못했다. 구원에 대한 지식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기독교는 구원을 위한 종교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 “구원”을 증거 하는 책이다(딤후 3:15; 요 20:31). 칼빈신학 역시, 성경의 이 목표를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책이다. 그러나 이 구원이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자의 구원과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 특별히 우리는 “구원론을 이해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구원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그것과는 다소 상이한 지극히 개신교 스콜라적 체계를 가진 교리적이며, 연역적인 논리체계를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하는“구원에 대한 이해”는 무엇인가? 우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합리성에 토대를 둔 개신교 스콜라적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은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성과 상태, 그리고 영적인 문제와 같은 비합리적 근원을 구원의 전거로 삼는다. 따라서 칼빈 구원론은 교리적인 내용이 앞서거나, 논리적 진술을 통하여 구원론(Soteria: 구원, 구조 + logos: 이론, 학문)의 교리를 구성하기보다, 오히려 영혼과 경건의 문제, 심령의 상태와 같은 문제를 통하여 구원의 근본적인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칼빈의『기독교강요』를 읽다 보면, 교리적인 논리성보다 영혼과 경건의 문제, 심령과 정서적 문제가 전면에 부각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신학 전반에 흐르는 있는 영혼과 경건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구원론의 토대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칼빈 구원론에는 영혼에 대한 실재성(reality)과 확실성(certainty)이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심각한 상태의 인식과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성으로서 경건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정립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들(fructus)을 온전하게 맛볼 수 없다. 구원은 죄인을 위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떤 본질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구원은 의미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고 본질을 실재로 믿지 못하는 구원이란 거의 의미 진술에 불과한 지식적인 신앙에 불과하다.

2.2.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fructus)에 대한 개념적 정의

칼빈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은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은 “개념적으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의 은혜를 통하여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영적인 복(spiritual blessedness)이다. 즉,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좋은 것(bona)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기독교강요』3권 1장 서두에서 유익이라는 단어를 “모든 유익”(all the benefits) 혹은 “그의(그리스도) 유익”(his benefits)으로 이해한다. 칼빈은 이 유익(복들)에 대하여 강요 IV권 I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구원과 영원한 복락”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다. 결국 유익은 “구원받는 우리가 누리는 현세와 내세의 모든 복과 즐거움을 말한다(엡 1:3).”


구원은 이해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고전 2:4) 안에서 영원한 복의 실재를 “누리고”, “소유하고”, “즐기는 것”이다(Inst., III.3.1). 그러므로 유익은 어원적으로 “enjoyment”, “revenue”, “income”, “fruit”, “reward”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다. 결국 칼빈 구원론의 유익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 구속사역을 논리적으로 진술하거나 의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천국에서 얻을 상급이며, 현세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맛보고 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복이다.


또한 유익은 종종 “좋은 것”(bona)이라는 단어와 교차하여 사용된다. 즉, 유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은혜의 열매들은 성령과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것”(ours)이 된다. 그런 점에서 유익은 우리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과 믿음을 통하여 소유하는 하늘의 “영원한 유업과 상급”의 좋은 것이다.


칼빈은 유익을 설명하기 위해 강요 III권 1장 3절에서 성령의 칭호와 유익을 관련시킨다. 즉, 성령은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이며”(고후 1:22; 엡 1:14), “생명”(롬 8:10)과 “물”(사 55:1)로서 “모든 천국의 보화(heavenly riches)를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게 하는 샘(요 4:14)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천국의 좋은 것(bona)을 제공한다. 성령의 열매(fructus)는 곧, 현재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나라의 왕의 보화를 우리에게 주는 열쇠이다.”


또한 칼빈은 믿음과 관련하여 유익을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은 우리의 지각과 이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선물(supernaturale donum)이다. 초자연적 선물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을 위한 통로이다.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유익(fructus)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완전한 구원”이다.


유익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한 믿음의 목표(scopus fidei)이며, “은혜의 보화”(thesauri gratiae)이다. 그리스도는 유익과 관련하여 우리의 의(iustitiae)이며, 생명이며, 좋은 것(bona)이다. 그리고 의는 오직(sola) 믿음으로만 소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정(predestination)을 통하여 영생과 하늘의 하늘(신 10:14)에 속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예정되어 있음을 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신자에게 적용되는 은혜의 결과(effectus)와 관련하여 유익은 “생명의 기업” (vitae haereditatem)을 얻도록 양자 삼으신 일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중생(regeneratione)의 거듭남을 통하여 천국의 유업을 소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성화론의 마지막 장인 III권 18장에서 유익을 중생된 신자의 행위의 보상(reward)과 관련시킨다.


정리하자면, 칼빈신학에서 유익은 개념적으로 하늘의 복, 천국의 보화, 은혜의 보화, 좋은 것(bona), 구원과 영생, 장차 받을 생명의 기업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은 신앙의 목표이자, 선택하심의 목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결과(effectus)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유익이란 성령의 열매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져오신 하늘의 보화 곧, 하늘의 모든 좋은 것(summa bona)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은 칼빈 구원론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칼빈이 중심적인 내용으로 삼아 그의 신학 전체를 전개하는 주요한 중심주제이다. 따라서 칼빈은 항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하늘의 좋은 것(bona), 곧 은혜의 열매들을 맛보고 소유하는데 우선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유익이며 유익을 목표하지 못하는 신앙은 그 본성을 상실한다(Inst., III.2.1).

다음호에 계속.....(각주는 저자의 책 참조 책 구입 문의는 010-2304-7374로 문의)

편집/곽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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